[김우창 칼럼] 경향신문 2005-11-23
[시대의 흐름에 서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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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 언론의 자유가 극도로 확대된 때문인지, 언어의 사용에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되던 모든 규율이 폐기된 것이 오늘의 언어 환경이 되었다. 공적 공간에도 거칠고 감정적으로 과장된 언어가 범람한다. 언어의 여러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을 정확히 기술하는 것이겠는데 (무엇보다도 우리의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그것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데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요즘 우리가 많이 듣는 언어는 주로 표현적 기능에 봉사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듣게 되는 많은 말들은 자기표현을 한껏 시도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알게 모르게 억압된 심정을 표출하려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부산에서 열린 아·태정상회의의 보도를 접하면, 지엽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참석자들이 우리의 전통 의상을 보고 한국의 미에 흠뻑 빠졌다든지, 또는 차려 놓은 음식의 맛에 완전히 사로잡혔다든지 하는 표현들이 보인다. 이번 회의의 참석자들이 특히 감격하기 쉬운 감성의 소유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보통 사람들은 남의 나라에서 우연히 보게 되는 의상이나 음식에 그렇게 쉽게 정신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거칠고 감정 휩쓸린 언어 범람-

프랑크푸르트 도서전과 관련된 한국작가 낭독회에 관한 홍보자료를 점검하면서 나는 ‘한국문학 독일을 휩쓸다’라는 표현을 ‘한국작가 독일 도시를 순방하다’ 정도로 고칠 것을 종용한 일이 있다. 그러나 요즘의 감수성으로 보아 그것이 사정을 바르게 판단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는지 모른다. 도서전 행사의 홍보나 보도에 등장하는 언어가 나타내는 열기와 흥분의 도가니에 휩쓸려들기에는 독일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일에 너무 바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지만, 홍보와 보도의 열광의 언어들은 막을 수가 없었다.

사실이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오늘날 사람들은 강한 언어를 원한다. 또 사람들은 사실보다는 언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상징물에 쉽게 반응하고 흥분한다. 최근에는 숭례문 또는 남대문이 국보 1호인 것이 옳은 것인가를 놓고 여론이 비등했다가 조금 잠잠해진 일이 있었지만, 광화문이나 현충사의 현판을 두고 벌어졌던 논쟁은 더욱 뜨거운 것이었다. 나는 여러 해 전에 한글의 로마자 표기에 관한 회의에 갔다가 그 개정의 필요 근거로서 민족주의나 민주주의가 열렬하게 주장되는 것을 보고 놀란 일이 있다. (미군정이나 군사정권이 만든 표기법은 개정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얼마 전 러시아에서는 방부 처리되어 유리관에 보존되어 있는 레닌의 시신을 매장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영국의 한 신문은 이 문제가 제기된 것은 푸틴 대통령의 실정에 대한 공격을 피하자는 정부 측의 계책이라는 음모설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이 음모설이 사실이든 아니든 적어도 흥분제로서의 상징의 역할이 큰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정치는 시각화·이벤트화 원한다-

최근의 아·태정상회의의 여러 행사 보도를 보면, 오늘의 국제 정치가 언어와 이미지 또 기타의 상징물로 이루어지는 공연 예술의 성격을 띠어 간다는 인상을 준다. 보도된 것으로는 이 거대한 공연 행사에서 합의된 것은 비교적 간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다른 회의들에서도 선언된 바 있는 자유무역의 확대를 포함하여 세계화의 기획을 계속 추진한다는 점에 합의한 것이다. 합의는 정상들이 선언문에 서명하기 전 정부 간의 실무적 합의를 거친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도된 것만으로는 헤아려 볼 수 없는 세부 사항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 의미도 비전문가가 간단히 짐작할 수 없는 복잡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국제 관계의 현실로 확인되기 위해서는 정상회의라는 이벤트가 되고 공연이 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오늘의 대중 정치는 시각화와 이벤트화를 요구한다. 그것을 통하여 보다 논리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들이 실감나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 현실은 가상의 현실로 바뀌게 된다. 오늘의 정치는 이러한 가상현실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시각화나 공연화는 예로부터 중요한 정치의 수단이었다. 거대한 건축물이나 군중집회는 정치를 북돋는 장치들이다. 또 이와 함께 더욱 적극적으로 대중 동원에 작용하는 것은 격렬한 감정의 촉발이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사람들에게 사회 개혁을 위한 동기로서 혁명적 정열을 강조한 소위 ‘혁명적 낭만주의’와 같은 것이 그 대표적 예이다. 사르트르는 ‘감정론’이란 책에서 감정을 말하면서 그것은 “우리가 세계에 부딪쳐서 ‘그것이 요구하는 과제를 감당할 수 없음으로 하여 유발되는’ 의식의 퇴화 현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반드시 맞는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혁명적 낭만주의는 바로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정열을 공급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그것이 지탱하기 어려운 것이고 또 현실의 구체적인 사실에 부딪혀 좌절할 가능성이 큰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사르트르의 생각은 완전히 맞는 것도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다. 이러한 양의성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대중 동원 또는 추상적으로 발상되는 유토피아적인 거대 계획들에서도 볼 수 있다. 사실 모든 계획은 그것이 현재보다 미래에 관계되는 한 허구적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결국 그것의 최종적인 결산은 지극히 범속한 구체적인 삶의 총계로서 완성된다. 오늘의 가상현실의 정치도 비슷한 가능성과 문제점을 갖는다. 삶의 긴급한 필요를 위한 생산보다는 현실적인 소비가 중요해진 사회에서 가상현실은 삶의 구체적 현실을 대체한다.

그러니까 구체적인 현실이 그다지 급박하지는 않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가상현실을 시험하는 것은 삶의 구체적 현실이다.

세계화의 경우, 그것은 가상현실이라기보다는 미래를 향한 하나의 비전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것을 향한 움직임은 이미 일정한 경제적 효과를 낳고 있고 사람들에게 그 혜택을 베풀고 있다. 우리가 수긍하든 아니하든 그것은 어쩌면 세계가 향하여 가는 불가피한 미래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것은 조만간 인간 공동체에 불러일으킬 여러 문제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들에 답하고 그것을 수동함으로써 그것은 내용이 있는 삶의 현실이 될 것이다. 세계화가 농업과 농촌의 몰락을 촉진하고, 거기에 따 르는 노동 유연성의 요구가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직업 안정성을 빼앗아갈 것이라는 것은 이미 많이 지적된 바 있다. 또 그것은 (이미 그러한 안전망이 구축되어 있는 곳에서는) 사회 안전망의 축소 그리고, 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지탱해주는 사회적 그물의 해체를 가져 올 수 있을 것이다. 세계화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경제발전에 못지 않게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대처하고 수용하느냐 하는 현실의 시험이다.

-가상현실은 삶의 문제 해결 못해-

이러한 구체적 문제와 씨름하지 않는 거대 기획보다도 더 우려되는 것은 일반적 현실의 가상화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유달리 집단적 흥분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반응하여 강한 언어와 분노와 열광의 상징들이 등장한다. 오늘의 정치의 가상현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람 사는 일의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는 가상현실의 정치에 의하여 해결될 수 없다. 사람의 현실은 흥분으로부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최근 신문에 보도된 열린우리당의 조사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국민들이 말의 과다와 실수, 즉흥적인 정책, 경제보다는 정치 편중-이러한 것들이 지금 정부의 특징이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정부가 말과 상징의 잔치를 통한 흥분의 기회를 마련해주지 않은 때문은 아닐 것이다.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by blackhole | 2005/12/28 03:37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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